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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사에서 20년, 30년을 일했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경력입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한 직장에서 일해온 사람들을 보면 그 시간 자체가 하나의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의 성장과 위기를 함께 겪고,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몸으로 배웠으며,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익혔을 테니까요.
그런데 퇴직을 앞두고 회사 밖 채용시장을 들여다보면 조금 당황스러운 순간이 생깁니다. 내가 그렇게 오래 쌓아온 경력을 다른 회사에서도 똑같은 가치로 인정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회사 안에서는 모두가 알고 있던 나의 역할이 회사 밖으로 나오는 순간 설명해야 하는 경력이 됩니다. 직급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장, 팀장, 실장이라는 명함은 이전 회사에서는 많은 것을 설명해줬지만 새로운 회사에서는 그 직급보다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그래서 퇴직 전에는 한 번쯤 이런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오래 일했다는 사실 말고, 다른 회사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회사 경력과 내 경력 구분하기
오랫동안 한 조직에서 일하다 보면 회사의 경력과 자신의 경력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서 25년 동안 구매 업무를 담당했다고 해보겠습니다. 회사 이름이 주는 신뢰가 있고, 기존 거래처와 시스템이 갖춰져 있으며, 내부 직원들의 협조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환경에서 좋은 성과를 냈다고 해서 다른 회사에 가서도 같은 방식으로 성과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회사 이름이 사라져도 남는 능력도 있습니다.
- 거래처와 가격을 협상했던 경험
- 납기가 지연됐을 때 문제를 해결했던 경험
- 신규 업체를 발굴하고 평가했던 경험
- 예산을 관리하고 비용을 줄였던 경험
- 부서 간 의견 충돌을 조정했던 경험
- 후배 직원에게 업무를 가르쳤던 경험
이런 것들은 회사가 바뀌어도 사용할 수 있는 경력입니다.
퇴직을 준비할 때는 자신이 근무했던 회사 이름이나 직급보다 이런 경험을 하나씩 떼어내 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저는 경력 재설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직급 없이 경력 설명하기
중장년 이력서를 보면 경력을 직급 중심으로 적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업부 10년 근무”, “영업팀장 7년”, “영업본부장 5년”처럼 적으면 오랫동안 일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채용하는 회사가 궁금해하는 정보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새 회사에서 알고 싶은 것은 그 직급에서 실제로 무엇을 했느냐입니다.
예를 들어 “영업팀장 7년” 대신 다음처럼 바꿔볼 수 있습니다.
“기존 거래처 관리와 신규 거래처 개발을 담당했으며, 영업사원 8명의 업무를 관리했습니다. 매출 부진 지역을 분석해 거래처를 재정비하고 신규 거래처를 발굴한 경험이 있습니다.”
같은 7년의 경력이지만 느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숫자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했던 업무와 해결했던 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저는 중장년의 경력은 ‘몇 년 일했는가’보다 어떤 문제를 여러 번 해결해봤는가에서 가치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경험 정리하기
오랜 경력이 모두 현재의 경쟁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 매우 중요했던 업무가 지금은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으로 자동화됐을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을 직접 만나 처리했던 업무가 온라인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고, 종이 문서와 전화로 처리했던 일을 지금은 협업 프로그램과 데이터로 관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나는 예전 방식으로도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경력이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경력을 정리할 때는 세 가지로 나눠보는 것이 좋습니다.
- 그대로 가져갈 경력 : 새 직장에서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경험
- 업데이트할 경력 : 기본 경험은 있지만 새로운 기술이나 도구를 배워야 하는 영역
- 내려놓을 경력 : 과거에는 중요했지만 현재 시장에서는 활용도가 낮은 경험
이 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경험 하나하나에 애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퇴직 후 재취업은 과거 경력을 모두 들고 가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 필요한 경력을 골라 다시 조립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경력 자산 눈에 보이게 만들기
회사 안에서는 내가 일을 잘한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사 밖에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퇴직 전부터 경력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정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해볼 수 있는 것은 프로젝트 목록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기억에 남는 업무를 적어봅니다.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결과는 어땠는지를 세 줄 정도로 정리하면 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신규 교육과정 개설 과정에서 강사 섭외와 운영 일정 관리
- 민원 증가 시기에 상담 절차를 정리해 반복 문의 감소
- 온라인 교육 전환 과정에서 기존 업무 절차를 비대면 방식으로 변경
- 신규 직원 교육자료 제작 및 업무 인수인계 체계 정리
이런 기록들이 쌓이면 이력서뿐 아니라 면접에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포트폴리오라고 해서 디자이너나 개발자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 사무직이나 관리직도 자신이 해결했던 업무와 프로젝트를 정리하면 충분히 경력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연했던 능력을 강점으로 바꾸기
오래 일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고서를 정리하는 일, 회의 내용을 요약하는 일, 거래처와 통화하는 일, 후배를 교육하는 일, 문제가 생겼을 때 관련 부서와 조율하는 일을 너무 오래 해왔기 때문에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직종이나 작은 회사에서는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특히 중소기업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직 경험이 있는 중장년의 강점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능력을 “저는 다 할 줄 압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과 잘 지냅니다”보다 “부서 간 일정이 충돌할 때 담당자들과 우선순위를 조정해 업무 일정을 다시 잡는 역할을 자주 맡았습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경력을 다른 직종 으로 연결하기
퇴직 후 반드시 같은 업종으로 재취업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직종으로 이동하면서 기존 경력을 일부 활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영업 경험이 있다면 고객 상담이나 교육 상담으로 이어질 수 있고, 생산관리 경험은 안전관리나 시설관리 업무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직원 교육 경험은 직업교육이나 사내강사 업무로 확장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직업 이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용했던 능력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경력의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 회사에서 쓰던 업무 언어를 새로운 직종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리점 관리”라는 경력을 다른 분야에서는 “거래처 관계관리”, “고객 요구 파악”, “계약 및 일정 조율”이라는 능력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혀 다른 직업처럼 보이는 일들도 의외로 연결되는 지점이 생깁니다.
퇴직 전 경력 정리하기
퇴직하고 나서 회사 자료를 다시 확인하려고 하면 이미 늦을 수 있습니다. 물론 회사의 영업비밀이나 내부자료를 가져가서는 안 되지만,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미리 정리할 수 있습니다.
퇴직 전에는 다음 정도는 개인적으로 기록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 최근 10년 동안 담당했던 주요 업무
- 직접 해결했던 문제 사례
- 성과가 좋았던 프로젝트
- 함께 일했던 부서와 외부 협력사 유형
-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업무도구
- 교육하거나 관리했던 직원 수와 역할
- 관련 자격증과 교육 이력
이 기록은 나중에 이력서를 작성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무엇보다 퇴직 후 “나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지?”라는 막막함을 줄여줍니다.
예상 질문
Q. 한 회사에서 오래 일한 것이 재취업에 불리할 수도 있나요?
오래 근무했다는 사실 자체가 불리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회사의 방식에만 익숙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므로 새로운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 직급보다 실제로 수행했던 업무와 문제 해결 경험을 설명하는 편이 좋습니다.
Q. 관리직 경력만 있는데 실무직으로 재취업할 수 있을까요?
가능하지만 실제로 어떤 실무를 할 수 있는지 정리해야 합니다. 관리자로 일하면서도 예산관리, 거래처 대응, 보고서 작성, 일정 조율, 직원 교육 등 여러 실무를 해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경험을 구체적으로 분리해서 설명하면 도움이 됩니다.
Q. 경력 포트폴리오는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요?
화려하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를 문제, 나의 역할, 해결 과정, 결과 순서로 한두 페이지씩 정리하면 됩니다. 회사의 기밀자료나 내부 문서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작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Q. 오래된 자격증이나 교육이력도 적어야 할까요?
지원하는 직무와 관련이 있다면 적을 수 있습니다. 다만 오래전에 취득했고 현재 활용하지 않는 자격증을 지나치게 많이 나열하면 핵심 경력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지금 지원하려는 일과 연결되는 경험을 우선적으로 보여주는 편이 좋습니다.
결론
오래 다닌 회사의 경력은 분명 소중합니다. 하지만 퇴직 후에도 그 경력이 자동으로 같은 가격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회사 이름과 직급을 빼고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했고, 어떤 사람들과 일했으며,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를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일부 경험은 내려놓을 수도 있고, 새로운 기술을 배워 업데이트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경력을 버린다는 표현보다 경력을 다시 편집한다는 표현이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20년, 30년 동안 살아온 직장생활을 모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사용할 부분을 골라 새로운 직업에 맞게 다시 구성하는 것입니다.
퇴직 후 가장 아까운 것은 나이가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경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래 일했다는 사실이 경력의 완성은 아닙니다. 그 시간 속에서 무엇을 가져갈 것인지 골라내는 순간부터 새로운 경력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