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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남편이 은퇴하면 아내의 혈압이 오른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은퇴 남편 증후군'입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웃어 넘겼는데, 막상 제가 퇴직 후 집에서 두 달을 보내고 나서야 그게 농담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설계가 필요한 시작이었습니다.
은퇴를 '연옥'으로 보는 이유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은퇴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희망도 역할도 사라진 채 그냥 시간을 버티는 기간처럼 느끼는 거죠. 직접 겪어보니, 그 감각이 이해가 됐습니다. 30년 넘게 아침마다 출근하던 리듬이 사라지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이상하게 소화가 안 되고, 밤잠이 얕아졌습니다.
그런데 '연옥(purgatory)'이라는 단어는 결이 다릅니다. 연옥은 라틴어로 '정화하다, 씻어내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지옥처럼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 희망이 남아있는 과도기라는 의미입니다. 60대 이후의 시간을 이 정화의 기간으로 본다면, 그 기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이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전 세대는 은퇴가 곧 인생의 마침표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다르다고 합니다. 평균 수명이 늘었고, 건강 상태도 이전 세대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좋아졌습니다. 돈·일·관계, 이 세 가지를 다시 설계할 수 있는 시간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저는 이 관점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퇴직 후의 두 달을 낭비가 아닌 준비 기간으로 다시 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소나를 바꾸지 못하면 생기는 일
퇴직하고 첫 한 달간 은퇴자들은 계속 전 직장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오랜 친구들을 만나도, 동네 카페에서 혼자 앉아 있을 때도, 그들의 머릿속은 온통 "예전에 제가 팀장으로 있을 때는…"이라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게 얼마나 어색하게 보였는지, 나중에 아내 또는 자녀들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해 듣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페르소나(Persona)는 심리학에서 '역할에 따라 사람이 외부에 드러내는 사회적 얼굴'을 의미한다 합니다. 여기서 페르소나란, 내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느냐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사회적 정체성이라고 보면 됩니다. 문제는, 30년 동안 직장에서 굳혀온 페르소나를 은퇴 후에도 그대로 붙들고 있으면 사회 부적응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노후에 정신 건강이 좋은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페르소나를 잘 바꾸는 능력'을 꼽습니다(출처: 대한노인정신의학회). 인연이 달라지면 나도 달라져야 한다는 불교적 표현이 새삼 와닿는 부분입니다. 영화 <인턴>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노년의 인턴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자신의 세대 문화와 경험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젊은 조직 안에서 새로운 역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이상적인 페르소나 전환의 예시였습니다.
의식적으로 "나는 지금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를 자문하기 시작하고 직함 없이도 역할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레테, 재능을 꽃피울 용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50대 중반을 넘기면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알면서도 안 하고 있다는 겁니다. 글 쓰는 걸 좋아했지만, "이걸로 뭘 하겠어"라는 생각에 늘 뒤로 미뤘습니다.
아레테(Arete)는 고대 그리스어로 '탁월함, 자신의 본질적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상태'를 의미한다는데요. 여기서 아레테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의 기질과 재능을 활짝 꽃 피우는 삶의 방식 자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비유하면 'Prosper(물질적 번영)'가 아닌 'Flourish(꽃을 활짝 피우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에서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주인공이 세속적 안정(6펜스)을 버리고 그림이라는 자기 재능(달)을 선택한 이야기는, 장수 사회에서 더욱 현실적인 질문이 됐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직장을 던지고 새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재능을 발견하는 것과, 그것이 시장에서 수요가 있는지를 함께 확인하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현실적이라 생각합니다.
자기실현형 활동과 생계형 일자리는 구분해서 봐야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은 중요하지만, 재능·수요·수익성을 함께 검토해야 비로소 의미 있는 계획이 됩니다. 저는 블로그에 글 한 편씩 쓰기 시작한 것이 그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작은 목표를 이루며 쌓이는 성취감이, 생각보다 훨씬 강한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관계 재설계, 은퇴 후 가장 어려운 숙제
퇴직 후 가장 처음 느낄 수 있는 건 '조용함'이라고 합니다. 매일 쏟아지던 카카오톡 알림이 뚝 끊기고, 회사 단체 채팅방에서 나오는 순간, 은퇴자들은 관계의 절반쯤을 잃은 셈이 된다고 합니다. 제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사실은 '업무 동료'였다는 것을 생각하는 시점이 된다고 합니다.
하버드대학교의 성인발달연구소가 80년 넘게 진행한 장기 추적 연구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자산 규모도, 직업도 아닌 '관계의 질'이었습니다(출처: Harvard Study of Adult Development). 도쿄대학의 연구 결과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관계가 건강과 수명에 직결된다는 사실은 이제 단순한 상식이 아니라 데이터로 증명된 이야기입니다. '관계'가 중요한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더욱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은퇴 후 관계는 두 가지 방향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양적으로 줄어들고, 질적으로 재편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특히 한국 남성의 경우, 은퇴 전에는 외부 사회적 관계가 관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 부부와 자녀와의 '찐 관계'를 새로 설정해야 한다는 숙제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은퇴 남편 증후군이 단순히 남편의 문제가 아닌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가사 분담, 생활 리듬, 대화 방식이 맞지 않는 상황에서 부부 모두의 적응이 필요한 공동의 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는 생각보다 구체적인 경로가 필요했습니다. 주민센터 프로그램, 지역 도서관 독서 모임, 자원봉사센터 같은 곳이 생각보다 문턱이 낮았습니다. 친목 활동은 정서적 안정을 주고, 사회 활동은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이 됩니다.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이 제가 직접 써봤을 때 가장 효과적이었습니다.
예상 질문
Q. 은퇴 후 무기력감은 왜 생기는 건가요?
A. 무기력감의 근본은 '역할의 소멸'이라고 봅니다. 긴 날들 동안 매일 아침 내가 왜 일어나야 하는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이유가 사라진 겁니다. 페르소나 이론으로 보면 기존의 사회적 정체성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새로운 역할을 의식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 되리라 봅니다.
Q. 은퇴 후 친구를 새로 사귀는 게 가능한가요?
A. 가능합니다. 다만 직장에서처럼 자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다릅니다. 제 경우엔 지역 도서관 독서 모임과 주민센터 프로그램이 가장 진입 장벽이 낮았습니다. 처음 두 번은 어색했지만, 꾸준히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됐습니다. 설문 결과를 보면 60대 이후의 친한 친구는 평균 4~5명 수준으로, 수를 늘리기보다 깊이를 더하는 방향이 현실적입니다.
Q. 재능이 있어도 수입으로 연결이 안 되면 소용없는 거 아닌가요?
A. 아레테, 즉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는 활동이 반드시 수입으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생계가 걸려 있다면 재능만이 아니라 시장 수요와 수익성을 함께 꼭 따져봐야 합니다. 자기실현형 활동과 생계형 일자리를 처음부터 구분해두면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조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Q. 일을 못하는 상황이면 은퇴 후 삶이 의미 없어지나요?
A.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습니다. 역할은 반드시 직업일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가족을 돌보는 것, 이웃과 교류하는 것, 배움을 이어가는 것,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것 모두 충분히 의미 있는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건강이나 장애 문제로 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 중심 역할론'을 강요하는 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좋은 은퇴는 과거의 역할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다시 사용하는 과정이라고 정리하게 됐습니다. 페르소나를 유연하게 바꾸고, 아레테를 현실적으로 설계하고, 관계를 의식적으로 재구성하는 것. 이 세 가지가 함께 맞물릴 때 연옥의 기간이 비로소 정화의 시간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의지와 용기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겠지요. 건강 상태, 간병 부담, 경제적 여건은 개인의 노력 바깥에 있는 변수입니다. 마음가짐과 함께 경제적 준비, 건강 관리, 구체적인 관계 형성 경로가 같이 갖춰져야 은퇴 준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루 30분~40분은 걷기, 매주 책 한 권, 블로그 글 한 편. 저는 이 작은 루틴에서 시작했고, 그게 생각보다 꽤 단단한 기반이 됐습니다.
